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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이야기

국가와 왕실 행사의 진행과 의궤 제작 및 보관

<인조장렬후사존호존숭도감의궤>

의궤[儀軌]

: 조선시대 국가와 왕실의 중요한 행사나 건축에 대한 모든 진행과 업무 처리 과정을 빠짐없이 기록한 보고서



행사의 진행

  우선 국가와 왕실의 각종 행사를 치르기 위해서는 총 감독 본부격인 '도감[都監]'이라는 임시 기구가 설치되었습니다. 도감의 이름은 가례[嘉禮], 책례[冊禮], 국장[國葬]과 같은 행사 명칭에 따라 달라졌는데, 도감은 임시기구이기 때문에 보통 관리들이 겸직하였습니다. 총책임자인 도제조[都提調]는 정승 중에서 임명되었고 부책임자급인 제조[提調]는 판서 중에서 임명되었습니다.

  효율적인 행사 진행을 위해 도감의 업무는 본부인 도청[都廳]에서 총괄하여 추진하고 도청 아래에는 3개의 방[房]을 설치하여 업무를 분담하였습니다. 각 방에는 실무 담당자인 낭청[郎廳]과 감독관에 해당하는 감조관[監造官]이 있었고 이들을 지원하는 보조원이 배치되었습니다. 이들의 숫자는 각 행사에 따라 증감이 있었으며, 이 외에도 행사 종류에 따라 몇 가지 조직이 추가되는데 행사 부대시설을 담당하는 별공작[別工作], 각종 건축과 물품의 수리를 전담하는 수리소[修理所] 등이 있었습니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도청과 각 방, 별공작, 수리소에서는 매일 자신들의 업무를 낱낱이 기록한 등록[謄錄]을 작성하였고, 등록과 함께 중요한 기록의 하나는 반차도[班次圖]입니다. 반차도는 행사 진행을 위한 계획도로서 행사 참여자와 의장물[儀杖物]의 수, 위치 등을 정해 놓은 것입니다. 차도는 대개 채색으로 자세하게 그려져 글보다 행사 전반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었고. 이 반차도에 따라 행사 참석자들은 몇 차례 예행 연습을 진행하였습니다.



의궤의 제작

  국가 행사의 준비, 실행, 그 마무리까지의 전말을 기록한 의궤가 국왕과 관련기관에 보고된 다음에야 행사의 전 과정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행사가 완료되면 도감은 바로 해체되어 의궤청[儀軌廳]이라는 기구로 전환됩니다. 의궤청은 도감에서 주관한 행사 전반을 정리하여 의궤를 작성하는 기구로 도감에서 행사 중 작성한 등록과 반차도를 바탕으로 의궤를 작성하였습니다.

  의궤는 6-8부 내외로 제작되는데 왕이 친히 보는 어람용[御覽用],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하는 분상용[分上用]으로 구분됩니다.

  어람용 의궤는 고급 초주지[草注紙]에 해서체로 글씨를 쓰고 붉은 괘선을 둘렀습니다. 또 놋쇠 경첩으로 묶고 원환[圓環], 5개의 박을정[朴乙丁]과 국화동[菊花童]으로 장정하였습니다. 표지는 비단으로 만들었는데, 분상용 의궤는 초주지보다는 질이 낮은 저주지[楮注紙]를 사용하고 검은 괘선을 두르고 표지는 보통 삼베를 썼습니다.



의궤의 보관

  분상용은 의정부, 춘추관, 예조 등 국가 전례[典禮]를 관장하던 기관과 서울과 지방의 사고[史庫]에 분산 보관되었고, 어람용은 통상 1부가 제작되어 1776년(정조 1년) 규장각 설립 후 주로 이 곳에 보관되었습니다. 그러나 규장각은 궁궐의 한 복판에 위치하여 규장각에 보관된 자료들이 외침이나 정변에 안전지대가 될 수가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 졌고, 이에 군주 정조의 명으로 고려시대 이래로 국가의 보장지처(保障之處)로 주목받던 강화도에 규장각의 분소[分所]를 설치하게 됩니다. 1782년(정조 6년) 강화도에 설치한 규장각의 분소가 완공되는데 이곳이 외규장각[外奎章閣]입니다. 이때부터 어람용 의궤를 비롯하여 어제[御製], 어필[御筆], 어화[御畵] 등 왕실에 관련된 물품들을 집중적으로 보관하게 됩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을 보면 보관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정조 6년(1782년) 2월 14일(신사)

강화 유수 김익(金熤)이 외규장각(外奎章閣)이 완성되었다는 것으로 아뢰니, 하교하기를,
“외규장각의 공역(工役)이 이제 이미 끝이 났으니, 봉안(奉安)할 금보(金寶)·옥보(玉寶)·은인(銀印)·교명(敎命)·죽책(竹冊)·옥책(玉冊)과 명(明)나라에서 흠사(欽賜)한 서적(書籍), 열조(列朝)에서 봉안했던 서적, 보관되어 전해 오던 서적과 사고(史庫)에서 이봉(移奉)한 어제(御製)·어필(御筆) 등의 서적을 기록하여 책자(冊子)를 만들고서 내각(內閣)·외각(外閣) 및 서고(西庫)에 나누어 보관토록 하라.”
하였다. 


 

  조선시대 국가 행사의 기록인 의궤는 당시 사람들의 철저한 기록 정신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궤의 기록은 단순히 당시 의식 절차의 과정을 알려주는 도구로만 그치지 않으며, 의궤의 각종 기록과 반차도, 도설[圖說]은 당시의 경제, 사회, 복식, 음식, 공예, 회회, 음악, 무용, 국어 등 다양한 분야 연구의 기초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위 내용은 '잔치풍경-조선시대 향연과 의례' 전시도록 내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